저는 동시에 이제 한편으로는 약간 제가 자퇴했던 그 시절의 삶을 약간 부끄러워하고 박탈감으로 뭔가 기억하고 또는 한편으로 이거를 약간 이야기하기를, 꺼내기를 두려워하고 또는 이제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이 경험을 약간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발명하고자 치열하게 거리를 두고 떠나왔던 그 공간, 그 장소, 그곳에서 여전히 차별과 혐오를 날 것으로 경험하면서 노동과 또 성적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 학교 바깥에 저 존재들 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퇴한 성소수자들이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존재 그런 식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어릴 때 자퇴하던 시절에 어른들이 저한테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니 공부부터 해야지. 우선 삶부터 만들어야지. 우선 성공부터 해야지. 우선 대학부터 가야지. 그래야 네가 소수자로서 먹고 살지. 야 소수자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어른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더라고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죠. 당시에 저도 뭘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제가 자퇴를 하고 삶을 위해서 남들과 거리를 두고 내 삶을 만들기 위해서 학교를 포기하는 그런 결단을 하고 왜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무언가를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로 번역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습니다. 저는 자퇴한 성소수자 아니면 그런 비천한 삶을 살고 있는 성소자들이 단순히 불쌍한 상태,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태, 수동적인 상태로만 묘사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자퇴한 것을 또는 뭐 트랜스젠더로 사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불쌍해가지고 밀려나고 내가 이렇게 살기 싫었는데 내가 어릴 적부터 막 치마 입는 걸 좋아해가지고ㅠㅠ’ 표현하는 게 뭐 편하기는 하죠.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퇴는 ‘할 수 없는 상태’로만 여겨지는가 왜 트랜스젠더라는 상태는 ‘할 수 없음’의 상태로만 대표되는가 왜 소수자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의 상태로 여겨지는가 저는 자퇴를 실패가 아니라 밀려난 경험이 아니라 내 삶을 내가 통제하고 내가 만들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결단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어떤 다른 삶을 말하는 사람들의 대학은 또는 우리가 다른 학교를 만들고 싶다면 우리가 위치해야 할 자리는 대학이 아니라 바로 자퇴한 이들이 서 있는 다른 삶을 만들기 위해서 주체적인 결단을 시작한 그 자퇴한 성소수자들의 자리가 아닐까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른 사회를 향한 상상력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새삼스럽게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원래는 없었습니까? 원래 우리는 그냥 막 스테레오 타입으로 존재하는 성소수자들은 질문 존재하지 않았고 이 사람들은 여러분들한테 막 어떤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그랬습니까? 저는 저 멀리에 대학에 갔다, 아니면 탤런트가 됐다 아니면 뭐 성공했다, 부자가 됐다 막 게이인데 막 CEO가 됐다. 이런 식으로 저 멀리가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자퇴한 성소자들 정말 천박한 꼴을 하고 막 이상한 여장을 하고, 막 화장실을 배ghl하고, 막 그런 천박한 꼬라지를 하고 있는 그런 소수자들 그런 소수자들의 눈을 마주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소수자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도 왜 다른 이들에 비해서 ‘어디에나 존재한다’의 사례로 언급되지 않는지 저는 그게 너무나 궁금합니다.
제가 자퇴했을 때 그리고 제가 자퇴한 트랜스젠더들이랑 어울렸을 때 어른들은 소수자성에 숨어가지고 우리가 자퇴한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야 너네만 힘든 거 아니라 다들 힘들어”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수자도 변호사도 되고 멋있는 사람도 되고 막 저렇게 성공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너는 왜 노력을 안 하냐. 저 사람들도 할 수 있는데 왜 너네는 못 하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어른들한테 정말 묻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우리는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저는 학교 바깥에서 아니면 학교 안에서도 단지 일상을 살고 싶었고 공부하고 싶었고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왜 나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들은 그럴 때면 ‘내가 공부하고 싶다. 나 트랜스젠더지만 공부하고 싶으니까 학원비 좀 내달라.’ 이러면 학원비 아깝다는 티 팍팍 내고. 아니면 그런 친구도 있었어요. 그냥 정말 학교 밖에서 혼자 공부해가지고 막 모의고사 1등급 만들고 다 그랬더니 이제 응시료 내가지고 대학 수시 지원도 하고 그것도 지원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하나만 지원하라고 했다는 거예요. 7만 원이 아깝다고. 그 응시료 7만 원이 아깝다고 그 집 심지어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랬습니다. 그런 일들이 늘 다반사였습니다.
왜 나를 책임져야 하는 또는 우리를 책임져야 했던 그런 어른들은 늘 우리를 그럴 때는 무시했으면서 기본적인 건 늘 공부고 일단 성공하는 거라고 했으면서 사실 기본적인 공부는 책 읽지도 않고 그리고 우리가 뭐 트랜지션 하는 거는 ‘너네를 사랑하니까 좀 통제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저는 정말 매번 청소년기부터 저와 제 친구들은 매번 물어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공부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또 다른 트랜스젠더들이 이미 말하고 있었고 이미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공부할 수 있는데 당신은 그냥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고 그냥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내가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리에 나가서 그냥 친구들하고 놀고 싶고, 공부하고 싶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인데 왜 나는 안 되는가? 당신들의 시선을 피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가 당신들의 질문을 듣지않는 것처럼 막 ‘왜 열심히 안 사냐’ 이 질문에 우리가 왜 회피한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눈을 피하는 건 당신들이었다. 질문을 피하는 건 당신들이었다. 눈을 피하고 대답을 피한 건 정말 당신들이었다. 저는 그런 생각으로 자퇴 시절을 보내왔습니다.
그런 자퇴 시절을 살아왔고 또 한편으론 그런 자퇴 시절을 부끄러워했던만큼 결국 이 질문이 저한테도 돌아오더라고요. 대학에 가고 나서 제가 어릴 때 던진 질문 저는 어쨌든 제 문제를 해결했지만 어쨌든 대학씩이나 다니고 있고 트랜지션도 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학교 바깥에서 그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어디에나 성소자가 갈 수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어디에나라는 장소에 갔지만 왜 나는 아직도 가지 못했는가. 당신이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럴 때 당신이 지나온 또는 여러 요인들로 극복할 수 있었던 그 자퇴의 시절 또는 소수자성, 그 안에 여전히 살고 있는 나는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왜 나는 여기에 여전히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었는가. 나는 당신도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단순히 그냥 뭐 어른 아니면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 이런 사람들만이 아니더라도 대학에 간 성소수자 우리한테도 자퇴한 성소자들은 직접 묻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그들 존재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한테 질문을 이미 던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다양한 성소수자가 있다.’는 말, ‘성소수자가 할 수 있다.’는 말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성소수자가 단순히 성소수자라는 패널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각자도생하고 서로를 그냥 먼 발치에서 바라볼 뿐인 그런 상황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소수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연대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당면한 문제를 어떤 국가나 그런 데에 위탁하고 그런 제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부터 직접 해결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때 우리가 제일 먼저 수치를 경험하고 내면화하도록 만든 그 학교라는 공간부터 개입해야 한다. 우리가 외면했지만 우리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자퇴 성소수자의 눈을 마주쳐야 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소수자를 위한 학교는 없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난 곁에 뭔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고, 갑자기 나타난 그런 사람처럼 다뤄져 왔지만 성소수자를 위한 학교가 없다고 한탄하는 데서 그치지 말자 그럼 우리가 말 그대로 ‘교실 없는 퀴어, 자퇴생 퀴어들를 위한 교실을 만들자.’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성소수자로서의 패널티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자퇴생 성소수자와 연대할 때 이곳 세상을 화장실처럼 배회하는 역사를 넘어서는 어떤 경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10명의 어떤 주체들과 함께 3월부터 학교 밖 성소수자를 위한 무료 검정고시 교실, 무지개 교실을 기획하게 됐습니다.